영적인 현자타임이라..

‘인간은 특히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지나고 나면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그토록 원하는 목표를 이루려고 피나는 노력을 지속한 뒤 결과의 끝을 마주했을 때

이토록 환상적인 시간이 곧 소멸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감에 허탈감을 지우지 못하고 곧 이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하지”

내가 그토록 원하는 목표가 무엇이었나? 미국 이민 후에 나를 사로잡았었던 한가지 열망. 공부하고 적응하는 와중에도 내 마음의 중심 가장 깊은 곳을 차지했던 나의 물음. “나는 왜 살아가는 거고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미국에 와서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 질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아빠한테 “아빠 왜 공부를 해야 해요?”라고 물어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절대로 아빠한테 속된 말로 개기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정말 객관적으로 올바른 답을 듣고 싶었고 순전히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라는 것은 학생이라는 나의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고 공부를 왜 하냐는 그 질문은 곧 내가 누구냐는 질문과도 연결돼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내가 누군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너무 알고 싶었다. 삶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내게 던지곤 했다.

그리고 내 인생에 교회라는 것이 나타났지. 교회는 내게 있어 나의 질문에 답을 알려준 곳이었다. 나는 물론 그 답을 믿지 않았다.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는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칼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언가를 자르는 것처럼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곧 예배하는 것이라고 교회는 그렇게 말했다. 삶의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 찾을 수 없으며 죽은 후에 영원한 삶 또는 죽음이 있다고 그렇게 가르쳤다. 나는 불신자였고 내 질문에 대한 이 교회의 답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오했다. 나를 만드셨으며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계시고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 하나님을, 그 분의 존재를 나는 반증 disprove하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믿게 된 후로 나는 정말 많이 변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명령들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들었던 부모님께 순종한 것부터 시작해서 찬식이와의 사이가 너무나도 좋아지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소중하게 대했다. 그렇게 자랑하기 좋아했고 교만했던 나는 나에 대해서 낮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하나님께 미쳐있었던 것 같다. 성경을 읽는 데에 하루에 몇 시간을 투자했다. 정말 할 게 없는 날이면 말 그대로 하루종일 성경 읽고 기도했던 것 같다. 새벽 기도를 갔을 뿐만 아니라 가지 않는 날에는 스스로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며 너무나도 많이 알고 싶은 그 열망에 기독교 서적을 찾아 읽고 끊임없이 질문했으며 하나님을 더 알고 성경을 더 알고 싶은 그 마음에 내 영혼이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하면서 너무나도 행복했으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났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났는데 기쁨의 눈물이었고 감동의 눈물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이었고 주체할 수 없는 그런 눈물이었다. 정말 정말 행복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최고라고 여겼고 하나님을 알면 다른 것은 아무 필요도 없고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거지가 되어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죽어도 좋다고 정말 하나님 옆으로 빨리 가고 싶다고 너무 행복해서 하나님 빨리 보고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니까 나는 내가 정말 노력해서 답을 찾고자 했던 그 질문,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이고 기초가 되는 내 물음에 대해서 답을 찾았던 거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그 질문의 객관적으로 올바른 답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였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그 답을 다시 태어나면서 내가 주관적으로도 믿게 된거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믿게 됐을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경험까지 한 거지.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복을 체험까지 한거지.

그러고나서부터 우울감이 찾아왔다. 극심한 외로움과 함께. 그리고 마치 애어른처럼 내 성격이 바뀌었지. 모든 것에 무심해지고. 다른 사람이 소소한 것으로 즐거워할 때 나는 같이 즐거워하지 못했고, 그렇게 즐거워하지 못했던 만큼, 다른 사람이 슬퍼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따라 슬퍼하지 못했지. 죽음도 이별도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고, 우정도 세상이 주는 즐거움도 내게 너무 뻔한 것이 되어버린 거지. 그리고 이런 것들은 지금도 그렇다. 누군가가 죽어도 전혀 슬플 것 같지 않고 내가 죽을 병에 걸려도 담담할 거 같다. 어떤 것을 해도 즐겁지 않다. 흥미를 느끼긴 하지만 내 온 마음을 사로잡는 듯한 그런 기쁨이나 몰두할 거리를 찾지는 못한다. 하고 싶은 게 없기에 모든 것이 하기 싫다.

 

 

 

 

하나님 감사해요. 그저 감사해요 이 모든 것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살아있음을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 나를 지어주셔서 나를 만들어주셔서 나라는 존재를 창조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