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현자타임이라..

‘인간은 특히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지나고 나면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그토록 원하는 목표를 이루려고 피나는 노력을 지속한 뒤 결과의 끝을 마주했을 때

이토록 환상적인 시간이 곧 소멸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감에 허탈감을 지우지 못하고 곧 이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하지”

내가 그토록 원하는 목표가 무엇이었나? 미국 이민 후에 나를 사로잡았었던 한가지 열망. 공부하고 적응하는 와중에도 내 마음의 중심 가장 깊은 곳을 차지했던 나의 물음. “나는 왜 살아가는 거고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미국에 와서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 질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아빠한테 “아빠 왜 공부를 해야 해요?”라고 물어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절대로 아빠한테 속된 말로 개기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정말 객관적으로 올바른 답을 듣고 싶었고 순전히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라는 것은 학생이라는 나의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고 공부를 왜 하냐는 그 질문은 곧 내가 누구냐는 질문과도 연결돼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내가 누군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너무 알고 싶었다. 삶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내게 던지곤 했다.

그리고 내 인생에 교회라는 것이 나타났지. 교회는 내게 있어 나의 질문에 답을 알려준 곳이었다. 나는 물론 그 답을 믿지 않았다.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는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칼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언가를 자르는 것처럼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곧 예배하는 것이라고 교회는 그렇게 말했다. 삶의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 찾을 수 없으며 죽은 후에 영원한 삶 또는 죽음이 있다고 그렇게 가르쳤다. 나는 불신자였고 내 질문에 대한 이 교회의 답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오했다. 나를 만드셨으며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계시고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 하나님을, 그 분의 존재를 나는 반증 disprove하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믿게 된 후로 나는 정말 많이 변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명령들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들었던 부모님께 순종한 것부터 시작해서 찬식이와의 사이가 너무나도 좋아지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소중하게 대했다. 그렇게 자랑하기 좋아했고 교만했던 나는 나에 대해서 낮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하나님께 미쳐있었던 것 같다. 성경을 읽는 데에 하루에 몇 시간을 투자했다. 정말 할 게 없는 날이면 말 그대로 하루종일 성경 읽고 기도했던 것 같다. 새벽 기도를 갔을 뿐만 아니라 가지 않는 날에는 스스로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며 너무나도 많이 알고 싶은 그 열망에 기독교 서적을 찾아 읽고 끊임없이 질문했으며 하나님을 더 알고 성경을 더 알고 싶은 그 마음에 내 영혼이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하면서 너무나도 행복했으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났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났는데 기쁨의 눈물이었고 감동의 눈물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이었고 주체할 수 없는 그런 눈물이었다. 정말 정말 행복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최고라고 여겼고 하나님을 알면 다른 것은 아무 필요도 없고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거지가 되어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죽어도 좋다고 정말 하나님 옆으로 빨리 가고 싶다고 너무 행복해서 하나님 빨리 보고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니까 나는 내가 정말 노력해서 답을 찾고자 했던 그 질문,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이고 기초가 되는 내 물음에 대해서 답을 찾았던 거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그 질문의 객관적으로 올바른 답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였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그 답을 다시 태어나면서 내가 주관적으로도 믿게 된거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믿게 됐을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경험까지 한 거지.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복을 체험까지 한거지.

그러고나서부터 우울감이 찾아왔다. 극심한 외로움과 함께. 그리고 마치 애어른처럼 내 성격이 바뀌었지. 모든 것에 무심해지고. 다른 사람이 소소한 것으로 즐거워할 때 나는 같이 즐거워하지 못했고, 그렇게 즐거워하지 못했던 만큼, 다른 사람이 슬퍼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따라 슬퍼하지 못했지. 죽음도 이별도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고, 우정도 세상이 주는 즐거움도 내게 너무 뻔한 것이 되어버린 거지. 그리고 이런 것들은 지금도 그렇다. 누군가가 죽어도 전혀 슬플 것 같지 않고 내가 죽을 병에 걸려도 담담할 거 같다. 어떤 것을 해도 즐겁지 않다. 흥미를 느끼긴 하지만 내 온 마음을 사로잡는 듯한 그런 기쁨이나 몰두할 거리를 찾지는 못한다. 하고 싶은 게 없기에 모든 것이 하기 싫다.

 

 

 

 

하나님 감사해요. 그저 감사해요 이 모든 것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살아있음을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 나를 지어주셔서 나를 만들어주셔서 나라는 존재를 창조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행동한 게 두번째가 아니다. 나는 정말 반성해야 한다. 그 때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자.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다.

무엇을 배웠나? 이성과의 만남에 있어서 관계적인 것에 관하여 많이 배웠다.

결론은? 내가 이성을 완전히 여자로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여자의 마음을 받거나 아니면 나도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성에게 고백을 받는다면 나같은 경우 마음이 약해서 괜시리 기분이 좋고 마치 그게 내가 그 이성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다. 솔직히 다혜는 내가 여자로서 좋아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게 알았지만 내가 다혜를 만나자고 한 것은 다혜같은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너무 먼 미래까지 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버리기는 아깝다는 그런 생각으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다혜의 반응을 보면서 이것이 여자의 마음을 갖고 노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정말 내 생각만 한 것이다. 나는 애초에 다혜한테 아무 마음이 없었으니 친구로 지내자고 했어야 하는거다.

이성이 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고 더 나아가 그 마음을 내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거나 고백할 때 내가 그 여자를 똑같이 이성으로서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는 분명하게 그 여자에게 나는 이성으로서의 아무 마음이 없다고 말을 해야 한다. 꼭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내 행동으로 그렇게 보여야 한다. 그렇게 그 이성의 마음을 받지 않고 거절하는 것이 힘들 수 있다. 내 약한 마음으로는 왠지 상처주는 것 같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는 솔직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다혜랑 사귀자고 한 다음에도 나는 마치 내가 다혜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 같이 행동 및 말했고 바로 이것이 다혜로 하여금 더욱 내게 마음을 주게 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했을 때 한 대 얻어맞았던 것 같은 것이다. 괘씸하고 내가 못돼게 행동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근데 내가 그렇게 사귀자고 한 다음에 정말 친구처럼 했어도 다혜는 상처받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사귀자고 한것도 잘못일 수 있겠지만 뭐 어쨋든.

그 때 Avery 도 그랬다. 나는 Avery를 좋아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근데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왜? 나는 항상 나를 좋아하는 여자애들 앞에서 그렇게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다. 근데 내가 마음이 없다면 나는 바로 그대로 말해야 한다.

앞으로 이성이 나를 좋아할 때 나도 그 이성을 좋아한다면 사귀는 거지만 그 여자만 나를 좋아한다면 나는 절대로 만나자고 하거나 그 여자를 나도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해선 안된다. 그러면? 그냥 친구처럼.

나는 이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친구 사이가 있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주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 같은 그 마음은 사실 친구로서 정말 그 존재로서 좋은 것일 수 있다. 나와 뭔가 다르고 새로운 것 때문에 그냥 얼굴이 예쁘기 때문에 좋아할 수도 있는 거고 말이다. 한마디로 친구로서 좋아하는 건데 헷갈릴 수도 있는 것이다.

샹하이 여행기

오늘은 와이탄에 가서 화려한 야경을 보았다. 그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타야 했다. 지하철 타는 방법도 모르고 위치도 모르고 인터넷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모두가 DiDi라는 앱을 통해 택시를 부르는데 카카오택시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DiDi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길거리에서 잡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와이탄이라는 곳은 샹하이에서 야경으로 가장 유명하여 사진으로 가장 많이 남기는 곳이다. 하여 어딜가나 사람으로 북적거렸고 길가에는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빈 택시들이 우리의 흔드는 손을 그냥 지나쳐 갔다. 필히 콜택시앱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게 몇몇 빈 택시들이 지나가고 시간도 함께 지나가고 부모님과 나는 땅에 쪼그려 앉기도 하며 계속 무작정 기다렸다. 마음이 초조하고 걱정이 되고 막막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우리들을 보살펴 달라고 하나님께 똑같이 무작정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살아계신 하나님이신데’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빈 택시가 우리 앞으로 왔고 나는 우리 호텔의 주소를 말했다. 그렇게 타서 우리가 머무는 호텔로 안전하게 잘 와서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다. 오늘도 샹하이 이 미지의 땅에서 이렇게 몸과 영혼을 보전하게 해주심을 감사하고 택시를 잘 찾게 해주시고 빈 택시가 우리 앞으로 오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전지전능하신 계획에 따라 그 섭리로써 우리들을 다스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가족을 먹이시고 태워주시고 인도해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택시 기사는 24살 먹은 형이였는데 지금까지 만난 아저씨 기사들보다 정말 착해 보였다. 말도 많이 걸어줬고 같이 얘기하며 웃기도 하였는데 사람을 보면 첫인상이 있듯이 이 형은 참 착해보였다. 뭐랄까 다른 누구보다 진실해 보이는 형이였다. 그래서 팁을 많이 주었다.

내가 깨달은 사실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딜 가나 참으로 복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 가는 곳이 샹하이 같이 냄새나고 사람 많고 말이 안 통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걱정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군대를 간다해도 그리고 어떤 직장을 가지게 된다해도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냐 하는 것 같다. 군대나 이번 여행같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야하는 곳이라면 그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 택시 기사 형과 얘기를 할 때 택시 안의 분위기가 밝아지고 나의 인식도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단거리 질주가 아닌 마라톤을 뛴다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누구를 만나든 저 사람을 계속 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처음에 너무 무리를 해서 내 모습이 아닌 가식적인 모습으로 대한다면 그들을 실망시킬 뿐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뜻 날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획은 곧 나의 거룩을 위한 것이요 나의 거룩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으면서도 삶 가운데에서 지키는 것은 무한한 적용이 가능하고 우리들의 지혜를 요구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삶 가운데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순간은 없는 것이고 어떻게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몸소 돌판에 써주시었다.

우리들에게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이 죄의 몸에서 벗어나 우리 주님의 의를 힘입어 완벽한 몸을 받기 위함이다.

“외유내강” 한 사람이 되자. 나 자신에게는 철저하되 이웃에게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나눠주는.

아아 나의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어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완벽하게 만족시켜주셨기 때문에 제가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이렇게 관계를 맺습니다. 제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과 연합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주님은 전부입니다. 주님이 이 땅 가운데 인간으로서 사신 게 제게 전부입니다. 성육신과  33년간의 인생과 그 고통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하심이 나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의 존재가 그리고 주님의 하신 일이 나의 전부입니다.

아아 정신 차리고 살아가야 한다. 아아 정신 차리고 하나님의 선교사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내가 나 자신을 돌보지 않을 때에도 내가 내 인생을 하찮게 여길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내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고 계셨구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구나.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 제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를 이렇게 선대하시며 저 자신조차 저를 하찮게 여겼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를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단 말씀입니까… 나는 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 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 힘은.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곧 나의 힘이다.

오랫동안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자기 반성과 나 자신을 개혁시키려는 노력을 등한시하였다. 생각 없이 그저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의지하여 몇 주간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게을리 하였다.

처음에는 자유롭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 나는 하나님을 떠나 그 어떤 기쁨도 목적도 소망도 살아갈 이유도 찾을 수 없다.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물을 정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가운데 정점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와 다르다고 인정하지 아니했는데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이상 저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매일 묵상하고 일기를 써야 한다.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내 친구들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사람을 대할 때 편하게 농담도 하면서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시며 하나님께서 악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내 인생 가운데서 실제로 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한 가지 또 깨달은 것은 사람은 할 일이 없으면 나태해지고 목표 의식이 뚜렷하지 않으면 시간도 노력도 낭비한다는 사실이다. 다음 날에 어떻게 될 지 모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나는 겸손해져야 한다.

오 하나님 저를 위하여 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대신하사 제가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한 판결과 심판과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그리고 저를 의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하나님.

하나님 너무 더러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제 몸 깨끗하게 순결을 유지해야 하는데 여자가 그냥 내 몸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머리를 만지고 등을 만지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 더럽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또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면 안되는데 담배도 피면 안되는데 다 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것인줄 믿지만 남용해서도 악용해서도 안되는데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법이 금지하는 것을 어겼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의지할 분은 완벽한 의인 나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지옥을 겪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셔서 저의 죄를 위해 중보하시는 하나님과 사람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하나님, 대학생들이 다하는 게임, 만화, 영화, 여러가지 문화의 다양한 면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분명 선한 면이 있고 타락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창조물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남용해서는 안되는줄 믿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믿지 않는 자와 믿음이 약한 자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지루해 보이고 약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삶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가장 좋은 인생이라는 것을 하나님 배우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사는 인생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서 언뜻 자유로운 삶 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죄의 노예인 삶이요 우리 인간은 죄에 대하여 자유할 때 주님 안에서 자유할 때 정말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죄로부터 자유로울 때 근심 걱정 영혼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을 나의 정말 주인님처럼 복종하며 사는 삶이 가장 불행이 적고 가장 행복이 많은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이 머리로는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어도 그것을 인생을 통해 진정으로 체감하고 경험하기 전에는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머리속의 든 가르침을 제 몸으로 제 영혼으로  제 가슴으로 조금씩 알게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매일 매일 머리로만 생각하려 노력했고 계속 까먹어서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경험을 하다 보니 이 가슴으로 알게 되는 깨달음들이 제 영혼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바꿔서 제 성격을 바꾸고 제 삶을 바꾼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머리로 배웠던 것들은 제 삶을 전혀 바꾸지도 못하고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는데 제 삶을 통해 머리에 있던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내 의지까지 바꿔버리니 제 삶이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의 아버지 예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수치 때문이다. 내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그래서 이런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나는 나에게만 집중한다. 외모, 학벌, 직업, 유머 모든 것으로 나를 가리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할 뿐더러 자꾸만 눈을 돌려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수치가 해결되었다. 바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여 주셨기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요 구원 받는 존재이다.

그렇구나, 예수님이 없으면 나는 남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 사람들 만날 때 나는 예수님 안에서 내가 하나님께 사랑할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어야 내가 저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저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구나.

사람들 만날 때 내 가슴 속에 있는 그 이상한 막연한 감정 그게 수치구나. 부끄러움. 저들 앞에 서기에 내가 뭔가 부족하고 잘못되었다는 막연한 느낌. 사람들 만나기 힘든게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구나.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야.

예수님만이 해결해주신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그 복음, 내가 주님 안에서 완벽하다는 사실. 주님의 의가 내게로 전가된다는 사실.

죽을 때에 후회하지 않을 인생, 내 인생 정말 성공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생은 평생 남을 사랑하면서 내 마음 피 흘린 인생, 평생 이웃을 사랑한 인생.

“사랑은 전쟁터”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전제 위에 나는 저들을 사랑한다.

나는 아주 교만하고 아주 악하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나는 어리다, 불안정하다 그리고 변덕스럽다. 내 안에 믿음은 확실하게 있지만 주님 안에서 서질 못하고 자꾸만 넘어진다. 나는 감히 잘난척해서는 안된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경건한 척하려고 하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바람이고 안개 아닌가? 내가 무엇이기에 내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잘난척을 하는가? 나 자신에 대해서 High view 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 없이는

주님, 정말 모르겠습니다. 뭐가 올바른 건지 혼란스럽습니다. 왜 개혁교회를 다니면 이렇게 마음이 차가워지는지 주님께 기도도 드리지 않고 말씀도 읽게 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개혁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주님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분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예배 분위기 속에서 정말 하나님이 무서워집니다. 너무 분위기가 심각해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살아갈 힘을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머리만 커지는 것 같습니다. 주님 저는 이제 개혁교회가 아닌 교회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 신학에 대한 깊이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부르는 찬양에 있어서 악기를 사용하지만 신학적으로 틀린 것은 없습니다. 물론 모든 노래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 구절을 그대로 따라부르는 그런 노래들을 들으면 정말 좋습니다. 하나님 왜 개혁 신앙에 빠질 수록 제 마음이 차가워집니까? 하나님을 따뜻한 아버지가 아닌 무서운 판사로 대하게 되고 계속 하나님이 제 삶 속에서 멀어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심지어 이제는 “주님 사랑해요”라는 찬송을 부르면 저런 감정에 치중하는 신학 어쩌구 저쩌구 그런 비난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정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주님 사랑해요 온 맘다해 주님 위해 살기 원합니다 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어떻게 잘못이란 말입니까? 개혁 신앙은 주님을 정말 높여드리지만 우리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정말 높아지고 주님이 더 드러날 때 우리는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고 그에 따라 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 이제 저는 신학과 주님을 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 고백과 주님을 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예배는 너무 너무 딱딱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하고 다녔지만 그리고 많은 유익을 얻긴 했지만 뭔가 나의 내면을 구속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개혁 교회 정말 신학이 올바르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없고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산다는 그런 열심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고 봉사하는 그런 열심,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은 개혁 교회가 한국 교회에서 배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 제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겠습니다. 주님 사랑한다고 주님 정말 고맙다고 그리고 주님이 내 전부라고 마음껏 고백하겠습니다.

공부하는 것 정말 선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방금 깨달은 것은 공부도 적당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 학기에 하루종일 공부만 했다. 일만 한 것 같다. 게임, 음악, 영화, 운동, 예술 같이 순전히 우리의 recreation and refreshment를 위해 있는 것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깨달은 것은 곧 공부와 여러 여가를 함께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가활동이나 문화활동을 아예 안해도 되는 줄 알았다. 물론 여가활동이나 문화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되지 않음으로 이런 여가활동을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도 정말 공부하고 일하는 것이 좋아서 그것을 우상으로 삼지 않는 한 공부가 곧 그들에게는 일과 여가가 동시에 될 수 있다면 계속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것 같지 않다.

앞으로는 공부하고 책 읽는 것도 좋지만 운동, 게임, 음악 듣기, 영화 듣기도 공부에 방해가 안 된다면 함께 병행하자. 그럴 때 내 마음도 즐겁고 공부도 더 잘할 수 있는 것 같다. 여러가지 여가 활동은 분명 무조건 재미를 위해서 보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재미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유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후에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