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함부로 포기하는거 아니다.

Advertisements

영적인 현자타임이라..

‘인간은 특히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지나고 나면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그토록 원하는 목표를 이루려고 피나는 노력을 지속한 뒤 결과의 끝을 마주했을 때

이토록 환상적인 시간이 곧 소멸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감에 허탈감을 지우지 못하고 곧 이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하지”

내가 그토록 원하는 목표가 무엇이었나? 미국 이민 후에 나를 사로잡았었던 한가지 열망. 공부하고 적응하는 와중에도 내 마음의 중심 가장 깊은 곳을 차지했던 나의 물음. “나는 왜 살아가는 거고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미국에 와서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 질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아빠한테 “아빠 왜 공부를 해야 해요?”라고 물어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절대로 아빠한테 속된 말로 개기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정말 객관적으로 올바른 답을 듣고 싶었고 순전히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라는 것은 학생이라는 나의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고 공부를 왜 하냐는 그 질문은 곧 내가 누구냐는 질문과도 연결돼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내가 누군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너무 알고 싶었다. 삶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내게 던지곤 했다.

그리고 내 인생에 교회라는 것이 나타났지. 교회는 내게 있어 나의 질문에 답을 알려준 곳이었다. 나는 물론 그 답을 믿지 않았다.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는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칼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언가를 자르는 것처럼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곧 예배하는 것이라고 교회는 그렇게 말했다. 삶의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 찾을 수 없으며 죽은 후에 영원한 삶 또는 죽음이 있다고 그렇게 가르쳤다. 나는 불신자였고 내 질문에 대한 이 교회의 답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오했다. 나를 만드셨으며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계시고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 하나님을, 그 분의 존재를 나는 반증 disprove하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믿게 된 후로 나는 정말 많이 변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명령들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들었던 부모님께 순종한 것부터 시작해서 찬식이와의 사이가 너무나도 좋아지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소중하게 대했다. 그렇게 자랑하기 좋아했고 교만했던 나는 나에 대해서 낮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하나님께 미쳐있었던 것 같다. 성경을 읽는 데에 하루에 몇 시간을 투자했다. 정말 할 게 없는 날이면 말 그대로 하루종일 성경 읽고 기도했던 것 같다. 새벽 기도를 갔을 뿐만 아니라 가지 않는 날에는 스스로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며 너무나도 많이 알고 싶은 그 열망에 기독교 서적을 찾아 읽고 끊임없이 질문했으며 하나님을 더 알고 성경을 더 알고 싶은 그 마음에 내 영혼이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하면서 너무나도 행복했으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났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났는데 기쁨의 눈물이었고 감동의 눈물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이었고 주체할 수 없는 그런 눈물이었다. 정말 정말 행복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최고라고 여겼고 하나님을 알면 다른 것은 아무 필요도 없고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거지가 되어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죽어도 좋다고 정말 하나님 옆으로 빨리 가고 싶다고 너무 행복해서 하나님 빨리 보고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니까 나는 내가 정말 노력해서 답을 찾고자 했던 그 질문,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이고 기초가 되는 내 물음에 대해서 답을 찾았던 거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그 질문의 객관적으로 올바른 답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였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그 답을 다시 태어나면서 내가 주관적으로도 믿게 된거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믿게 됐을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경험까지 한 거지.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복을 체험까지 한거지.

그러고나서부터 우울감이 찾아왔다. 극심한 외로움과 함께. 그리고 마치 애어른처럼 내 성격이 바뀌었지. 모든 것에 무심해지고. 다른 사람이 소소한 것으로 즐거워할 때 나는 같이 즐거워하지 못했고, 그렇게 즐거워하지 못했던 만큼, 다른 사람이 슬퍼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따라 슬퍼하지 못했지. 죽음도 이별도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고, 우정도 세상이 주는 즐거움도 내게 너무 뻔한 것이 되어버린 거지. 그리고 이런 것들은 지금도 그렇다. 누군가가 죽어도 전혀 슬플 것 같지 않고 내가 죽을 병에 걸려도 담담할 거 같다. 어떤 것을 해도 즐겁지 않다. 흥미를 느끼긴 하지만 내 온 마음을 사로잡는 듯한 그런 기쁨이나 몰두할 거리를 찾지는 못한다. 하고 싶은 게 없기에 모든 것이 하기 싫다.

 

 

 

 

하나님 감사해요. 그저 감사해요 이 모든 것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살아있음을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 나를 지어주셔서 나를 만들어주셔서 나라는 존재를 창조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행동한 게 두번째가 아니다. 나는 정말 반성해야 한다. 그 때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자.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다.

무엇을 배웠나? 이성과의 만남에 있어서 관계적인 것에 관하여 많이 배웠다.

결론은? 내가 이성을 완전히 여자로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여자의 마음을 받거나 아니면 나도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성에게 고백을 받는다면 나같은 경우 마음이 약해서 괜시리 기분이 좋고 마치 그게 내가 그 이성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다. 솔직히 다혜는 내가 여자로서 좋아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게 알았지만 내가 다혜를 만나자고 한 것은 다혜같은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너무 먼 미래까지 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버리기는 아깝다는 그런 생각으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다혜의 반응을 보면서 이것이 여자의 마음을 갖고 노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정말 내 생각만 한 것이다. 나는 애초에 다혜한테 아무 마음이 없었으니 친구로 지내자고 했어야 하는거다.

이성이 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고 더 나아가 그 마음을 내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거나 고백할 때 내가 그 여자를 똑같이 이성으로서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는 분명하게 그 여자에게 나는 이성으로서의 아무 마음이 없다고 말을 해야 한다. 꼭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내 행동으로 그렇게 보여야 한다. 그렇게 그 이성의 마음을 받지 않고 거절하는 것이 힘들 수 있다. 내 약한 마음으로는 왠지 상처주는 것 같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는 솔직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다혜랑 사귀자고 한 다음에도 나는 마치 내가 다혜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 같이 행동 및 말했고 바로 이것이 다혜로 하여금 더욱 내게 마음을 주게 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했을 때 한 대 얻어맞았던 것 같은 것이다. 괘씸하고 내가 못돼게 행동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근데 내가 그렇게 사귀자고 한 다음에 정말 친구처럼 했어도 다혜는 상처받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사귀자고 한것도 잘못일 수 있겠지만 뭐 어쨋든.

그 때 Avery 도 그랬다. 나는 Avery를 좋아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근데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왜? 나는 항상 나를 좋아하는 여자애들 앞에서 그렇게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다. 근데 내가 마음이 없다면 나는 바로 그대로 말해야 한다.

앞으로 이성이 나를 좋아할 때 나도 그 이성을 좋아한다면 사귀는 거지만 그 여자만 나를 좋아한다면 나는 절대로 만나자고 하거나 그 여자를 나도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해선 안된다. 그러면? 그냥 친구처럼.

나는 이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친구 사이가 있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주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 같은 그 마음은 사실 친구로서 정말 그 존재로서 좋은 것일 수 있다. 나와 뭔가 다르고 새로운 것 때문에 그냥 얼굴이 예쁘기 때문에 좋아할 수도 있는 거고 말이다. 한마디로 친구로서 좋아하는 건데 헷갈릴 수도 있는 것이다.

샹하이 여행기2

오늘은 또 평양 옥류관이라는 북한 식당엘 갔었다.

북한 누님들이 원래 나이보다 늙어보였던 것

–왠지 성숙하고 조신한 누님들의 말투와 서비스

누님들의 공연

–가슴 아팠다. 말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있는 먹먹함. 왜였을까?

무엇보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

중국 베이징 올림픽, 한국 서울 올림픽, 일본 도쿄 올림픽 이렇게 발전하는 세상.

샹하이에서 현대 사회의 과거를 보고 한국에서 현재를 보고 미국에서 미래를 보며

현대 사회는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가 보았다. 과거와 미래를 보고나니 사람 사는 것 모양과 형태만 달라지는 것이라고 아침에 펴서 밤되면 이슬처럼 사라지는 인생임을. 그런 인생 돈이 많다고 발전이 많이 됐다고 잘사는게 아니요, 왜냐하면 결국 반복되는 거니까. 절대적인 가치는 달라졌다 해도 우리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가치의 기준은 우리의 환경에 의해 달라진다. 한국에서 온 우리는 샹하이가 너무 못살지만 스지에나 케빈은 자신이 샹하이의 완전 샹류층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돈 발전 이런거는 헛것을 쫓는것과 같아

우리가 진짜 필요한 건 하나님인데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인데 북한 누님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아팠고 그것 때문에 첫째로 가슴 아팠고 같은 민족이 말 통하는 한민족이 갈라져 있다는 것이 둘 째로 가슴 아팠고 북한에서 태어나 온갖 고생하며 중국 먼나라까지 돈벌러온 누님들이 겪었을 아픔과 힘듬에 가슴 아팠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든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나는 절대로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거지로 살든 홈리스가 되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복되다. 정말 저주받은 불쌍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못배운 사람이나 학자나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보다 아예 복음을 듣지 못한채 죽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불쌍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기도할 것이다. 나는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샹하이 여행기

오늘은 와이탄에 가서 화려한 야경을 보았다. 그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타야 했다. 지하철 타는 방법도 모르고 위치도 모르고 인터넷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모두가 DiDi라는 앱을 통해 택시를 부르는데 카카오택시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DiDi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길거리에서 잡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와이탄이라는 곳은 샹하이에서 야경으로 가장 유명하여 사진으로 가장 많이 남기는 곳이다. 하여 어딜가나 사람으로 북적거렸고 길가에는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빈 택시들이 우리의 흔드는 손을 그냥 지나쳐 갔다. 필히 콜택시앱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게 몇몇 빈 택시들이 지나가고 시간도 함께 지나가고 부모님과 나는 땅에 쪼그려 앉기도 하며 계속 무작정 기다렸다. 마음이 초조하고 걱정이 되고 막막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우리들을 보살펴 달라고 하나님께 똑같이 무작정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살아계신 하나님이신데’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빈 택시가 우리 앞으로 왔고 나는 우리 호텔의 주소를 말했다. 그렇게 타서 우리가 머무는 호텔로 안전하게 잘 와서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다. 오늘도 샹하이 이 미지의 땅에서 이렇게 몸과 영혼을 보전하게 해주심을 감사하고 택시를 잘 찾게 해주시고 빈 택시가 우리 앞으로 오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전지전능하신 계획에 따라 그 섭리로써 우리들을 다스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가족을 먹이시고 태워주시고 인도해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택시 기사는 24살 먹은 형이였는데 지금까지 만난 아저씨 기사들보다 정말 착해 보였다. 말도 많이 걸어줬고 같이 얘기하며 웃기도 하였는데 사람을 보면 첫인상이 있듯이 이 형은 참 착해보였다. 뭐랄까 다른 누구보다 진실해 보이는 형이였다. 그래서 팁을 많이 주었다.

내가 깨달은 사실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딜 가나 참으로 복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 가는 곳이 샹하이 같이 냄새나고 사람 많고 말이 안 통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걱정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군대를 간다해도 그리고 어떤 직장을 가지게 된다해도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냐 하는 것 같다. 군대나 이번 여행같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야하는 곳이라면 그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 택시 기사 형과 얘기를 할 때 택시 안의 분위기가 밝아지고 나의 인식도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되어서 특별히 이곳에서 직업을 갖고 가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바라본 한국은 어렸을 때 바라보고 느꼈던 한국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한국은 놀기에는 좋지만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갖는 데에 있어서는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것 같다. 한국에 있었으면 하지 못할 많은 일들을 미국에 와서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기은 목사님이 하셨던 말.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자.

그리고 미국은 참으로 다양한 나라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소비자주의가 사람들의 정신에 박혀있다. 한국은 좀더 제약이 많다. 

또 한국은 사람들이 다양하지 않다. 생각도 다양하지 않다. 한 인종밖에 없고 한 문화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미국은 다양한 나라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한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가?

자, 내가 이번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반성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때 아무리 강렬하게 체감했던 진리라 할지라도 유한하고 일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매일 매일 새로운 것처럼 나 자신에게 다시 기억시키지 않으면 금방 까먹어 버린다. 정말 중요한 삶의 원리들도 자꾸만 기억하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고 지금 내 상태, 곧 머리 속에 든 게 없는 것 같고 내 삶을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원리가 없는 것 같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진정 껍데기 같은 존재인 것이다. 속에 그 마음에 무엇을 품느냐. 우리의 마음은 컴퓨터와 다르게 Intend 할 수 있는 능력, 곧 한 가지에 대해서 집중해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선한 것 곧 하나님의 복음을 자꾸만 생각하고 의지하는지 아니면 나 자신과 나의 능력과 이 세상 곧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자꾸만 머리속으로 생각하고 의지하는지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영의 일이라는 것은 그저 물질적인 것의 반대로서의 영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성령적인 곧 아무리 물질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 사고 방식이나 일을 일컫는 것이다. 사람은 그릇과 같아서 자신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마음 속에 주인으로 삼고 있는지에 따라서 모든 것이 변하는 존재인데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셨으며, 중요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보배라고 하셨다) 사람은 곧 자기가 예배하는 대상을 영광스럽게 하는 종교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드리지 않을 때 우리들은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되는 것들이나 그 만큼의 영광을 받아선 안되는 것들을 너무 영광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외부적인 자극에만 신경을 쓰며 살아가다보면 안되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그리고 공적인 예배와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자꾸만 과거에 일어난 그 모든 영광스러운 역사적인 진리들 곧 우리 주님의 성육신과 하신 모든 일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들이 함의하고 있는 의의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기념해야 한다. 우리 주님의 복음을.

앞으로 한국에 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내 영혼이 성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깨달은 것은 결국 매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굴 위해서 사는가? 누구의 영광을 위한 삶인가? 나의 삶인가? 주님을 위한 삶인가?

그리고 이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교회를 가며 안식을 하며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쓰지 말자.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단거리 질주가 아닌 마라톤을 뛴다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누구를 만나든 저 사람을 계속 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처음에 너무 무리를 해서 내 모습이 아닌 가식적인 모습으로 대한다면 그들을 실망시킬 뿐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뜻 날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획은 곧 나의 거룩을 위한 것이요 나의 거룩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으면서도 삶 가운데에서 지키는 것은 무한한 적용이 가능하고 우리들의 지혜를 요구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삶 가운데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순간은 없는 것이고 어떻게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몸소 돌판에 써주시었다.

우리들에게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이 죄의 몸에서 벗어나 우리 주님의 의를 힘입어 완벽한 몸을 받기 위함이다.

“외유내강” 한 사람이 되자. 나 자신에게는 철저하되 이웃에게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나눠주는.

아아 나의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어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완벽하게 만족시켜주셨기 때문에 제가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이렇게 관계를 맺습니다. 제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과 연합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주님은 전부입니다. 주님이 이 땅 가운데 인간으로서 사신 게 제게 전부입니다. 성육신과  33년간의 인생과 그 고통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하심이 나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의 존재가 그리고 주님의 하신 일이 나의 전부입니다.

아아 정신 차리고 살아가야 한다. 아아 정신 차리고 하나님의 선교사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내가 나 자신을 돌보지 않을 때에도 내가 내 인생을 하찮게 여길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내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고 계셨구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구나.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 제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를 이렇게 선대하시며 저 자신조차 저를 하찮게 여겼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를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단 말씀입니까… 나는 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 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 힘은.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곧 나의 힘이다.

인생은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고 변수가 너무나도 많아서 단순한 인과관계로 일반화시킬 수 없다.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 일반화시켜 말하기는 쉽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변수가 다양하여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지혜는 어렸을 때 공부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인생을 살 방법을 터득했다거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된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말이다. 

오늘 운동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은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름을 위해서 순간적으로 몸매를 만드는 일에 신경을 쏟곤 한다. 하지만 힘겹게 만든 그 몸도 관리를 하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망가져버린다. 

하나님을 처음 믿었을 때 기쁨과 열정으로 성경을 많이 읽고 신학책도 많이 읽으며 기도도 많이 했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나는 정말 많이 공부한 편이다. 그런데 여기에 안주하고 신학을 다 안다고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성경을 읽지 않고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한다면 내 영혼은 망가지는 내 육체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 

마라톤 같은 인생이고 특히 요즘과 같은 세대에는 한 가지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드물다. 나도 정말 정신을 차리고 성경도 기도도 매일 매일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계획적으로 성경을 읽지도 않고 있으며 규칙적으로 기도도 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 서적 읽는 일도 그만둔지 몇 주가 되었다.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금방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불신자인지 하나님의 자녀인지 사탄의 자녀인지 알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다. 정신을 차리고 매일 매일 꾸준하게 선택을 했으면 집중을 하여 체력 분배를 잘하며 그렇게 일관성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자기 반성과 나 자신을 개혁시키려는 노력을 등한시하였다. 생각 없이 그저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의지하여 몇 주간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게을리 하였다.

처음에는 자유롭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 나는 하나님을 떠나 그 어떤 기쁨도 목적도 소망도 살아갈 이유도 찾을 수 없다.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물을 정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가운데 정점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와 다르다고 인정하지 아니했는데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이상 저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매일 묵상하고 일기를 써야 한다.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내 친구들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사람을 대할 때 편하게 농담도 하면서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시며 하나님께서 악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내 인생 가운데서 실제로 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한 가지 또 깨달은 것은 사람은 할 일이 없으면 나태해지고 목표 의식이 뚜렷하지 않으면 시간도 노력도 낭비한다는 사실이다. 다음 날에 어떻게 될 지 모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나는 겸손해져야 한다.